석두 희천 石頭 希遷
<조당집>에 전하기를: 선사의 휘諱는 희천이요, 속성은 진陳씨이며, 단주端州 고요高要 출신으로, 길주吉州 행사行思 화상의 법을 이었고, 남악南嶽에 살았다. 태중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비린내와 누린내 나는 음식을 끊었다. 탄생하는 날 저녁 방안에 광명이 가득하여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무당巫祝에게 물으니, 무당이 “이는 길하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풍골이 단정하고 수려하며, 턱이 모지고 귀가 크며, 극히 조용하여 잡되지 않으니, 예사 아이들과 다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어릴 때(7-8세 무렵)에 절에 갔는데, 불상을 보자 어머니가 절을 하게 하면서, ‘이것이 부처님이시다’ 하니, 선사가 절을 하고는 한참 바라보다가, “이 사람의 형상이나 손발 어디가 사람과 다른가? 이가 부처라면 나도 부처가 되리라.” 고 말하였다. 이에 승속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 친척과 마을에서는 모두가 미신을 숭상하여 희생물을 가지고 가서 복을 빌었는데, 동자가 불쑥 따라가서 보고는 제단을 헐고 희생물을 빼앗아 가지고 오기를 10여 년 동안 하니, 친족들 모두가 절을 돌면서 더욱 깨끗한 업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 때 6조가 바야흐로 바른 법을 펴고 있었는데, 선사는 대대로 신주新州 가까이 살았으므로 바로 가서 육조를 뵙게 되었다. 육조가 한번 보자마자 기뻐하며 머리를 만지면서, “네가 나의 참 법을 잇게 될 것이니라.” 하고는, 밥상을 함께하면서 출가하기를 권하니, 이에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났다. 개원開元 16년에 나부산羅浮山에서 구족계를 받고 율부律部를 뒤지다가 장점과 단점을 발견하고 분연히 탄식하기를, “자성自性이 청정함이 계戒의 본체이다. 여러 부처님은 지음(作)이 없거늘 어찌 남(生)이 있으랴?”하고는 이로부터는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고, 문자를 숭상하지도 않았다. 또 승조僧肇의 <涅槃無名論>을 보다가 “만상萬像을 망라해서 자기를 삼는 것은 성인뿐이시다.”라고 한 곳에 이르러, “성인은 자기가 없되 자기 아닌 것이 없고, 법신法身은 한량이 없거니 누가 나와 남이라 말하랴. 둥근 거울이 그 사이에 비치면 만상의 현묘한 본체가 저절로 나타난다. 경계와 지혜가 진실로 하나이거니, 누가 있어 가고 오는가? 참으로 훌륭하도다. 이 말씀이여.” 라고 말하였다.
일찍이 산골 초막에서 잠시 졸다가, 자신이 육조와 한 마리의 거북을 타고 깊은 못 안을 헤엄쳐 가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서 “거북은 신령한 지혜요, 못은 성품의 바다이니, 나와 우리 스님은 함께 신령한 지혜를 타고 성품의 바다에 항해한지 오래 되었구나.” 라고 말했다. 육조가 임종할 때에 선사가 묻기를,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는 누구를 의지하리까?”하고 물으니, 조사가 “행사 스님을 찾아가거라.” 대답하였다. 조사가 입적하자 바로 청량산淸凉山 정거사靜居寺 행사行思화상을 찾아가 절을 하고, 곁에 모시고 섰으니, 화상이 “어디서 왔는가?” 묻자, 선사가 “조계에서 왔습니다.” 대답하였다. 이에 화상이 화양자和痒子(효자손)를 들어 올리고, “거기에도 이런 것이 있던가?” 물으니, 선사가 “거기뿐만 아니라 서천西天에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화상이 “그대는 서천에도 가 본 모양이구나?” 하니, 선사가 “만약 갔었다면 거기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화상이 “틀렸으니 다시 말하라.” 다그쳐 묻자, 선사가 “화상께서도 반쯤은 말씀하십시오. 어째서 저더러만 말하라 하십니까?” 라고 말하니, 화상이 “그대에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뒷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없을까 걱정이니라.” 라고 말했다. 화상이 또 “그대가 조계에 갔었다는데, 무엇을 얻어 가지고 왔는가?” 물으니, 선사가 “조계에 간적도 없고 잃은 적도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오히려 “화상에서 일찍이 조계에 계실 적에 큰스님을 아셨습니까?” 질문하였다. 화상이 “그대는 지금 나를 아는가?” 물으니, 선사가 “안다고 해도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고, “화상이 영남에서 나오신지, 여기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물었다. 화상이 “나도 모른다. 그대는 언제 조계를 떠났느냐?” 되물으니, 선사가 “저는 조계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대답하자, 화상이 “나는 그대가 온 곳을 안다.”고 말하자, 선사가 “화상께서는 어르신인데, 경솔한 말씀을 마십시오.” 하였다. 화상은 선사가 예사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서협西俠 시자실에 있게 하니, 아침저녁으로 오로지 화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사는 <참동계參同契>를 저술하였고, 당의 정원貞元 6년 12월 6일에 입적하니, 춘추는 91세요, 승납은 63세였다. 희종僖宗황제가 무제無際라 시호하고 견상見相이라고 탑호塔號를 드렸다.
진월이 찬탄 첨부한다.
행사行思의 법을 잇고 육조의 뜻 이루어,
마조와 쌍으로서 강호江湖로 회자膾炙되며,
후손을 깨우치시는 “참동계參同契”를 남겼네.
석두희천 선사는, 초조 보리달마 선사의 맥脈을 이어서 남종을 이룬 육조 혜능 회상에 일찍이 참석하였으며, 그 유지를 따라 청원행사 선사에 참문하고 법을 받아 호남(湖南)에서 회상을 이루시니, 당시 남악회양의 법을 이은 강서(江西)의 마조도일 선사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왕래 방문하는 바, “강호江湖”의 한 축을 형성하신 분으로서, 후대의 선종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셨음이 높이 평가됩니다. 그분의 걸출하고 호방한 인품과 선풍이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