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십팔조第二十八祖 (中國初祖)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조당집>에 전하기를, 남천축국 향지대왕香至大王의 셋째 태자로서 반야다라 조사의 법을 받았는데, 조사가 일러 말했다. “그대가 지금 나의 법을 받았으나 너무 멀리 교화하러 가지 말고, 내가 열반에 든 지 67년 뒤 동쪽 나라에 가서 법을 크게 베풀라. 그대는 너무 서두르지 말라...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남쪽에는 머무르지 말라. 그 나라의 왕은 불법의 참 이치는 모르고 유위법의 인연 짓기를 즐기어 공덕을 좋아하니, 그대가 그 나라에 가거든 머물지 말고 바로 떠나라. 나의 참언을 들어라. "길을 가다가 물을 건너서 다시 양羊을 만나니,(路行跨水復逢羊) 혼자서 쓸쓸히 남 몰래 강을 건너리라. (獨自恓恓暗渡江) 한낮에 코끼리와 말이 애처로운데,(日下可怜雙象馬) 두 그루의 어린 계수나무 오래도록 번성하리.(兩株媺桂久昌昌)”
<전등록>에 전하기를, 보리달마 대사는 바다重溟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남해南海에 다다르니, 이때가 양梁의 보통普通 8년 정미년丁未年 9월 21일이었다. 광주廣州 자사刺史 소앙蕭昻이 주인의 예를 갖추어서 영접하고는 무제武帝에게 표表를 올려서 보고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고는 사자에게 조서詔書를 주어서 맞아드리니,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도착하였다. (주에는 이 사실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하며, 대사의 광주 도착시기를 보통 원년元年 경자년庚子年(520)이라고 바로 잡았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朕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양성한 것이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소?” 하니, 대사가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無)” 대답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물으니,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듯 하지만 실답지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지는 문답: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비고 적멸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 “확연廓然하여 거룩함聖도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모릅니다.”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기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달 19일에 몰래 강북을 돌아서 11월 23일에 낙양洛陽에 이르니, 이때가 후위後魏의 효명제孝明帝 태화太和 10년이었다 (주에는 후위 효명 정광正光 원년이라고 바로 잡았다).
그 뒤에 숭산嵩山의 소림사 少林寺에 머물렀는데, 벽을 대면하여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활달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 살면서 온갖 서적을 많이 읽고 현묘한 이치를 잘 이야기 하곤 하였다. 그는 늘 이렇게 탄식하였다,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예절, 술수, 풍류, 법규뿐이요, 장자와 <주역> 따위의 글은 묘한 이치를 다하지 못했다. 요사이 듣건대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계시면서 찾아가는 사람을 맞이하지 않고, 현묘한 경지를 이룬다고 했다.” 그리하여 달마대사에게 가서 날마다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신광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옛사람이 도를 구할 때에는 뼈를 깨뜨려서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서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털을 펴서 진흙땅을 덮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를 먹였다. 옛사람도 이러하였거늘 나는 또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그해 12월 9일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신광은 꼼짝도 않고 서 있는데, 새벽녘에는 눈이 무릎 너머까지 쌓였다. 대사가 불쌍히 생각해서, “그대는 오랫동안 눈 속에 서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물었다. 신광이 슬피 울며,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감로의 문을 열어서 온갖 중생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간청했다. 이에 대사가 “부처님들의 위없는 묘한 도는 오랜 겁을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와 경솔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으로 진승眞乘을 바라는가? 헛수고를 할 뿐이다.” 라고 대답했다. 신광이 대사의 훈계를 듣자 슬며시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곧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에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만 하구나.” 마침내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주자, 신광이 물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 대사가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 답했다. 혜가가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 청하였다. 대사가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 하니, 혜가가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이에 대사가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고 말했다.
뒤에 효명제가 대사의 기이한 행적을 듣고 사자와 조서를 보내서 부르기를 세 차례나 하였지만, 대사는 끝내 소림사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마납摩衲 가사 두벌과 황금발우, 은물병과 비단 등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마침내 받았다. 그 때 이후로 스님과 속인의 무리가 갑절이나 더 믿고 귀의하였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문인門人들에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각기 얻은 바를 말하지 않는가?” 이때 도부道副가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했다. 총지總持 비구니가 “제가 이해한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처럼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했다. 도육道育이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했다.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했다.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옛날에 여래께서 정법안장을 가섭대사에게 전했는데, 차례차례 부촉해서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부촉하나니, 그대는 잘 수호해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에게 가사를 전해서 신표로 삼나니, 제각기 표시하는 바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니, 혜가가 “스승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청했다. 대사가 “안으로 법인法印을 전해서 깨달은 마음과 계합하고, 밖으로 가사를 부촉해서 종지宗旨를 확정한다. 후세 사람들이 얄팍하게 갖가지 의심을 다투어 일으키면서, ‘나는 인도 사람이고 그대는 이곳 사람인데, 무엇으로써 법을 증득했다는 것을 증명 하리오?’ 라고 할 것이니, 그대가 지금 이 옷과 법을 받아 두었다가 뒤에 환난이 생기거든 이 옷과 내 법의 게송만을 내놓아서 증명을 삼으면 교화하는 일에 지장이 없으리라. 내가 열반에 든 지 2백년 뒤에 옷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겠지만, 법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 하리라. 그래서 도를 밝힌 이는 많아도 도를 행하는 이는 적으며, 이치를 설하는 자는 많아도 이치에 통한 자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잠잠히 부합하고 비밀히 증득하는 이가 천만이 넘으리니, 그대는 도를 드날릴 때에도 깨닫지 못한 이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 한 생각으로 근기를 돌이키면 문득 본래 깨달은 것과 같으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내 본래 이 땅으로 오려 한 뜻은, 법 전해 어리석은 이 구함이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이 열리면, 열매는 자연스레 이루어지리. 吾本來玆土 傳法求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대사가 다시 말했다. “나에게 <능가경> 네 권이 있는데, 이 역시 그대에게 부촉한다.”
며칠 뒤에 그 고을 태수 양현지楊衒之가 일찍부터 불법을 사모했다고 하면서 대사에게, “서역의 천축에서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으면 조사祖師라고 한다는데, 그 도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사가 “불심佛心의 종지宗旨를 밝혀서 행行과 해解가 서로 응하는 것을 조사라고 하오.” 라고 답했다. “그밖에는 어떠합니까?” 또 물으니, “모름지기 다른 이의 마음을 밝히고, 그 고금古今을 알고, 있음과 없음을 싫어하지 않고, 법을 취함이 없으며,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미혹도 깨달음도 없나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라고 칭하오.” 라고 대답했다.
대사가 교화의 인연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을 만났으므로,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이때가 후위後魏 효명제孝明帝 태화太和 19년 병진년 10월 5일이었다. 그해 12월 28일 웅이산熊山耳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나라의 송운宋雲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葱嶺에서 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신 한짝을 들고 홀홀히 혼자 가고 있었다. 송운이 “스님, 어디를 가십니까?” 물으니, “나는 서역으로 돌아가오.” 대답하였다. 송운이 황제에게 복명하고, 그 사실을 알리니, 황제가 대사의 무덤을 열어보게 하였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 온 조정이 경탄한 나머지 황제의 명에 따라 남은 신을 가져다가 소림사에서 공양하였다.
진월이 찬탄 첨부한다:
남인도 태자로서 출가해 도 이루고,
중국에 여래 심인 씨앗 뿌려 전하고서,
선법을 누리에 펴며 서래 조사 되셨네.
보리달마 존자에 얽힌 설화는 수없이 많고, 많이 알려져 있는 줄 압니다.
<조당집>과 <전등록>에도 많은 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지면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아무튼 인도로부터 석존 여래의 정법안장과 심인을 중국에 전함으로서 선법이 동 아시아에 전파되고, 세계로 번져 나가는 계기를 만들었음은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이름과 형상 등 현상적 의식에 집착하고 복을 짓는 유위법에 빠져 있던 세상에, 심성과 무명을 깨침으로 내적 세계의 초월적 지향과 무위법을 선양하고, 불교의 본래면목을 들어내어 이른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선종의 화두話頭가 되어 왔음을 되새겨 보게 합니다.
아울러, 그분이 정의한 ‘조사祖師’ 즉, “불심의 종지를 밝혀서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한 분”의 출현이 요청되며, 근래에 그분의 뜻이 새삼 더욱 귀하고 아쉽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