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설법: 초전법륜
여기서는 유명한 ‘초전법륜’을 전한다. 불교인이 갈 길은 감각적 쾌락주의와 육체적 고행주의 두 극단 사이의 ‘중도’로서, 1)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의 신체적이나 심리적인 고통, 2) 어떻게 고통들이 생기는지 [통찰에 의한] 그 근본 원인으로서의 집착, 3) 그 [집착과] 고통이 사라진 상태(열반), 4) 그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여덟 가지 방도(팔정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법회 교설의 끝에 한 시청자가 거기에 기초한 실험 수행에서 성취를
하였는데, 그는 담마의 전망(법견) 또는 담마의 눈(법안) 즉, 담마 실상의 직관 통찰을 얻었다. 특히,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고통현상은 집착을 끝내면 사라진다는 진실이다. 법안을 얻었다는 것은 최소한 예류향을 성취한 것을 가리키며, 이는 최대 일곱 번까지의 재생기간 안에 완전한 깨침을 이룰 수 있는 거룩한 분이 되는 것을 뜻한다. 거룩한 분들이란 깊은 영성적 통찰을 갖추어 완전히 또는 부분적인 깨침을 이룬 이들이다. 그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실상의 관점에서 고통현상과 그를 유발하는 원인 및 고통의 초월과 그를 위해 수행할 길이다. 이것들이 거룩한 분(석존)의 네 가지 진리들(사성제)이다. 이 법회는 다양한 신중들이 담마(법 진리)에 대한 초월적 통찰지에 의하여 붓다가 ‘법륜을 굴리다’라는 뉴스를 전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편집자 주)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 때, 거룩하신 세존께서 바라나시 이시파타나의 사슴동산(녹야원)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은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수행자로서 정진하는 이들은 이 두 극단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그 둘인가? 그 하나는 감각적 쾌락을 통한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저급하고 비천하며, 어리석은 보통 세속 사람들의 길로서 고상한 수행 목적 [성취]에 관련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고통을 주는 자학적 행위로서 고통스럽고 어리석으며 [그로서] 수행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으로 향하지 않으면서, 여래는 중도를 깨달았는데, 이는 전망을 일으켜 주고 지식을 일으켜 주며 평화와 고급 인식으로 이끌고 완전한 깨침과 열반에 이르게 한다.” [다음으로 이어짐]**
이상에서, 석존의 수행 체험에 기초하여 깨침과 적정 열반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최초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 이른바 불필요한 극단을 지양하며 온전하고 필요한 바른 길을 지향하는 "중도"인데, 석존 수행 당시의 기존 양대 수행체계의 한계를 보이며 그를 초월한 새롭고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길을 제시함으로서, 불교의 시작과 원리를 펼치게 되는 계기를 본다. '중도'는 단순히 양극단 사이의 중간길이 아니라, 올바른 길로서, 수행의 목표 즉 깨침의 과녁을 맞추는(적중시키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활쏘기처럼. 거룩한 삶의 가장 높은 목적을 성취하게 이끄는 가장 좋은 길이니, 이 길을 벗어나서는 본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에 유념해야 하리라...